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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여백

故 임안중 할머니


2004년 12월 26일.
음력으로 11월 15일.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뜨셨다.

너무나 홀가분히
어쩌면 너무나 많은 짐을 안고
세상을 떠나신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말보다도 행동으로 살아오신 분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일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배움의 가치가 무엇인지
검소함이 무엇인지
난 이 모든 것을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어린시절부터 나의 유일한 피난처는 할머니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히 내편이었던 분.
내가 무너지고 아파할 때
언제나 나를 일으켜 주었던 것은
할머니, 내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있으면
친구와 함께 있는 것보다도 더 좋았고,
할머니 생각만 하면
어떤 사랑보다도 간절하게 눈물이 나곤했다.

할머니는 점점 기억을 잃고 변해가셨지만
사실 너무 많은 걸 잊지 못하고 살아오셨다.
할머니가 그토록 놓지 못하신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할머니는 바로 누우시고는
손을 가지런하게 배에 올리고 주무셨다.
그렇게 그 자세로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묻히셨다.

내 안에 사랑이 있다면
그건 우리 할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보고자 했던 분.

포도송이 가득달린 하얀 상여를 타고 멀리멀리 떠나신 우리 할머니.
가장 평화로운 곳에서 평안히 살아계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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